Kim Sijong  -   Holly

Nov. 13, 2026 - Dec. 26, 2026

호랑가시나무(Holly)는 겨울이 깊어질수록 더 또렷해진다. 두툼하고 빳빳한 잎은 오각형, 육각형으로 각을 세우고 모서리마다 날카로운 가시를 달았으며, 다른 나무들이 잎을 내려놓은 계절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다. 그 푸른 잎겨드랑이마다 붉은 열매가 겨울에 익는다. 호랑이도 등을 긁다 찔릴 만큼 날카롭다 하여 호랑이의 이름을 얻은 이 나무의 가시는 열매를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품기 위한 울타리처럼 보인다.

이 나무를 둘러싼 이야기들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서구권에서는 가시를 예수의 면류관으로, 붉은 열매를 그의 피로 읽는 해석이 더해지면서 이 나무의 가지를 문 앞에 걸어 재앙과 악몽을 막는 풍습이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지를 문간에 매달아 마귀의 침입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땅과 시대가 달라도 가시는 어디서나 안쪽의 소중한 것을 지키고 품는 방식으로 읽혀 왔다. 그런데 이 나무는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기도 한다. 호랑가시나무는 자라면서 오래된 잎의 가시가 퇴화한다. 날카롭게 지켜내던 가시가 제 몫을 다하면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저마다 소중한 것을 위해 분투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며 돌아보고, 부드러워진 마음으로 다가올 내년을 준비하는 일은 이번 전시의 흐름과 닿아 있다. 여덟 작가는 서로 다른 시각 언어로 각자가 지켜 온 시간과 기억, 감각과 온기를 화면 위에 남긴다.

가시는 먼저 소중한 것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에서 돋는다. 황지영은 포근하게 감싸던 이불, 머리를 쓰다듬던 손, 까만 밤에 빛나던 달 같은 순간들이 사라지거나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지나쳐버린 조각들을 찾아 뒤돌아 걷는다. 그리고 "기어코 주머니를 채우듯" 그것들을 캔버스에 거둔다. 박지혜의 화면은 평화로워 보이는 장면 뒤에서 빛을 지켜내려 고군분투하는 존재들을 비춘다. 린넨 위에 먹과 채색, 자수를 더해 동물과 함께한 시간을 천에 꿰어 둔 작가에게, 무채색 풍경 속 작은 빛은 유한하기에 더 지켜내고 싶은 '함께'의 시간이다.

지켜 낸 시간은 이내 돌아보는 대상이 된다. 김시종은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의 바니타스(Vanitas)와 조선 민화의 길상을 한 화면에 겹쳐, 삶의 유한함을 돌아보는 일이 곧 지금을 충실히 살아갈 이유가 된다는 것을 사진이면서 회화인 이미지로 일깨운다. 한편 윤상윤은 왼손으로 그린 드로잉을 출품했다. 작가는 원래 왼손잡이였으나 어릴 때 오른손으로 바로잡혔고, 그 뒤로 오른손으로는 정교한 유화를 쌓아 왔다. 그런 그에게 왼손은 수고한 오른손에게 건네는 휴식이면서, 길들여지기 이전의 감각을 불러내는 방법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왼손의 불규칙한 선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심상이 보는 것을 기록하듯 이어진다. 처음 그은 무작위의 선이 다음 선을 부르고, 그렇게 만들어진 형태에서 이미지를 찾아내는 시간은 짧고 즉흥적이다. 그래서 기억 속에서 자꾸 맴돌던 장면과 그때의 감정이 고쳐지지 않은 채 화면에 남는다. 단순해진 얼굴과 풀어진 윤곽의 인물들은, 오른손 회화가 쌓아 올린 질서 아래 눌려 있던 것들이 흘러나온 흔적에 가깝다.

이어지는 이지은과 김연홍의 화면에서는 날카로운 윤곽이 번지고 흐려지며, 남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감각의 흐름이다. 이지은의 〈Bloom in the Night〉에서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온 꽃들은 한 화면에서 겹치고, 꿈에서 깨면 장면은 사라져도 색과 빛, 공기의 온도는 오래 남는다. 작가는 그 불분명한 상태를 해소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김연홍은 웹에서 수집한 풍경 이미지 위에 바람의 세기와 빛의 온도, 계절의 공기를 덧입히고, 물을 머금은 붓이 천에 스며들고 번지며 '가상의 계절'을 만든다. 그 얇은 화면은 연약하지만 안과 밖의 감각을 통하게 하는 막처럼 작동한다.

부드러워진 자리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최호준은 아이의 애착 인형에서 출발해 곰과 토끼, 호랑이 같은 친숙한 도상을 흙으로 빚는다. 민화 속 호랑이가 액을 막는 수호의 존재이면서 익살스러운 이웃이기도 했듯, 그의 도자는 지키는 존재도 웃는 얼굴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덴마크 작가 리네(Line Finderup)는 애니메이션 장면에서 출발해 3D로 구도를 짠 뒤, 이를 에어브러시로 캔버스에 옮긴다. 이번 신작은 작가가 예전에 살던 집의 욕실을 그린 장면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는 샤워처럼 평범한 일도 꼭 필요한 쉼으로 느껴지는데, 작가는 그 순간을 통해 시간이 다르게 흐르던 때의 일상을 되돌아본다. 같은 공간도 시점에 따라 낯설어져서, 장면의 어떤 조각은 선명하게 드러나고 어떤 조각은 닿을 수 없는 곳에 남아 관람객이 프레임 너머를 상상하게 한다. 웃음과 쉼은 팽팽했던 긴장이 풀린 자리에서 비로소 다시 찾아오는 일상의 모습이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호랑가시나무가 더 또렷해지듯,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들도 선명해진다. 지켜내려 애썼던 시간과 돌아보며 확인한 기억, 날카로움이 풀린 뒤에 찾아온 감각과 웃음은 여덟 작가의 화면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놓여 있다. 가시가 안쪽의 열매를 위해 존재했듯, 이 작품들도 저마다 작가가 소중히 여겨 온 무언가를 건네기 위해 만들어졌다. 관람객은 그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자신의 한 해에서 지켜 낸 것과 놓아 보낸 것, 다가오는 해에 다시 돋아나길 바라는 것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장에 놓인 작은 작품들이 저마다 붉은 열매가 되어, 관람객이 마음에 간직해 온 장면과 온기를 다시 꺼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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